지구 종말론의 해인 2012년의 시작(1월)과 함께 중풍으로 쓰러져 6개월의 병원 입원 생활후 2개월 더 자가치료 기간을 더해, 총 8개월의 휴직후,
우울증등에 의해 고립무원의 섬에 갇힌듯 한 남포센타 복직 생활~ ♧♧♧
죽다 살아난 못난 남편 병수발로 고생한 집사람에게 은혜 갚기 위한 삶을 살고자 모든 일상을 아내 말을 잘듣자로 정하여 새로운 삶 지표 삼기로 하였음에도,
47 평생 동안 가져온 독선과 욱하는 성격을 버리지 못하거나,
팔팔한 형사 생활을 하던중 인적없는 산속 바위밑에 천막을 치고 은신중인 거동수상자 신고를 받아, 출동하여 오인 신고인 것을 확인후,
산을 내려올때, 시내에선 안보이던 해수욕장 과 바다가 보이는 풍경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것을 바라본,
인근 밭에서 나온 어르신 "왈" 나이들어 산비탈 농사가 힘들다 며 매매제의" 하자~
이게 웬떡 !!! (형사가 천직인줄 알았던 내삶의 기준을 바꿔준 천운이 다가온 날)
보령 시내에선 보이지 않는 바다가 보이거나, 금닭이 알을 품는 장소인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의 명당을 뜻하지 않게 살수 있겠단 생각에,
그 즉시 528평을 5만원씩 사겠다는 구두 계약을 맺고,
그날 밤 감동으로 밤잠까지 설쳐가며 당직 근무후 퇴근 하여 집사람에게 자랑하자
"길도 없는 맹지 사놓고 좋다고 자랑 하는 것을 볼때 사기 당하기 딱 좋은 팔랑귀"라는 지적을 당한 후 돌아보니 집사람 말과 같이
포장 임도가 고개마루에서 끝나며, 비포장 산비탈길을 돌아 비탈옆에 있는 밭이 있고, 그 옆을 동쪽 산 정상에서 서쪽 방향의 남포 저수지로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 하천,
폭 2m가량에 하천 둑위에 나무 기둥 두개를 교각 대용으로 걸쳐 놓아 사람들의 통행로로 사용하며, 반대편 비탈길 옆에 100여평 규모의 물웅덩이 옆을 70도 각도의 경사를 약 20m가량 올라가는 난관을 거쳐야 만날수 있는 최고의 맹지인 것이 눈에 들어 오지만,
해가 떠오르는 동쪽과 북쪽, 남쪽등 세방향이 산골짜기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서쪽 해수욕장 방향만 열려있어 바다를 볼수 있는 전망과 뒤쪽에 있는 옥마산 말재고개 방향은 계곡과 산봉우리 두개가 보는 각도에 따라 마치 여성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형상의 여음곡 모양의 산세이며,
금계포란의 명당과 산골짜기에 흘러가는 계곡물만 보아도 투자가치는 충분 하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매매 대금을 주고 내 땅으로 된날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감동을 맛본것 같습니다.
이후 밭농사를 핑계로 왕래하던 중 이곳 남포면 읍내리 부락과 내가 매입한 명당터 주변 말재 고개가
천년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기전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국운을 의논키 위해 당대 최대의 사찰인 보령 성주사에 가던중
산중턱에서 만난 옥마를 옥황상제가 시험 삼아 내려 보낸 것을 모르고, 죽임으로써 나라의 운이 다했다 하여 옥마산이란 지명을 얻었고,
말재고개는 당시 옥마를 뜻하는 마재(馬岾)로 불리던 것이 말재로 변형된 것으로,
그 옛날 서해바다를 통해 남포현내 항구에 도착한 왕과 그 일행들이 보령시내부터 웅천읍까지 병풍과 같이 펼쳐진 옥마산을 넘어 산뒤쪽에 있는 구산선문 으로 당대 최대 사찰인 성주사로 가려면,
최대한 산마루가 낮은 곳을 택해 길을 내는 것은 당연지사일터~
이 고개가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에 등재되어 있거나, 부락 어르신들 또한 얼마전까지 보물산으로 부르며,
산을 넘어 부여장에 가는 장사꾼들의 무거운 짐을 지게등으로 고개너머까지 운반해 주고, 품삯을 받아 생활 하던 시절을 회상 하는 등, 선조들의 애환이 깃든 마을이란것을 알게 되어,
퇴직후 노후 전원 생활의터를 이곳으로 생각하고 집터를 마련코자 할때,
남포읍성 지방 문화재로 인해 문화재청의 승인 없이 주택건축이 불가능한 이곳에 보령시와 농업기반공사에서 부락민 농지를 사들여 주택 건축 가능한 대지를 조성후,
문화마을 이름으로 분양하는 기회를 만나 163평의 전원주택지를 매입 하여,
퇴직후 거주할 전원주택 부지와 인접한곳에 있는 옥마산 말재고개 입구 계곡 명당 밭이 일사천리로 내 땅이 되게 하는 것을 볼때 보이지 않는 신이 내 삶을 이곳으로 이끌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맹지 구입에 따른 집사람의 서운함을 없애 주기 위해 틈나는 대로 명당터를 가꾸며, 텃밭조성등 초보농사꾼 흉내를 낼때면 어디선가 산토끼들이 찾아와 시름을 잊게해 주곤하여 내선택이 틀리지 않았단 것을 증명해 주었고
주변 부락민들과 친분을 맺어 임도 옆 밭 44평과 하천 넘어 물웅덩이 380여평을 추가 매입 하는데 성공 하므로서,
금계포란형 명당 520여평으로 길을 만들수 있게 되며, 임도와 내땅이 맞닿을수있게 길을 내는 작업에 매달리게 되었으며 (이때만 해도 차량의 진입 여부가 맹지 탈출의 전부로 생각)
당시 길을 내는 노가다를 진행시 힘에부쳐 쉴때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불평하지만 나는 환경을 믿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일어나서 자기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찾아 나서며,
혹시!!
원하는 환경을 찾지 못하면 직접 환경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는 좌우명을 기재해 놓은 것을 보며,
곡갱이와 호미로 70도 경사면을 깍아 내어 길을 만들고,
고물상에서 H빔과 철판을 구입하여 다리를 놓아 밭에까지 차량이 들어갈수 있게 하는 등 맹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해 매달렸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소원인 전원주택의 꿈이 한순간에 없어질 뻔한 사고를 당하고 보니, 마음이 급해 남포센타 복직한 그해 겨울 더이상 미루지 말고 하루를 살더라도 내 집을 짓다가 갈때되면 가자는 생각으로
2013.1.14. 신한은행 공무원대출금 1억 포함한 2억원에 계약한 집짓기 공사가 시작 되었고,
건강한 사람도 집짓다 보면 업자와의 분쟁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없는 병도 생긴단 주위사람들의 우려를,
중증질환자인 나로선 최대한 스트레스 없게 진행 되도록 업자로부터 공사 조감도 등을 본후 내 사정을 알리고,전권을 일임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는 경험을 쌓고,
5개월여간 공사 90% 진행된 상태에서 살고있던 유성2차 아파트를 한전에서 전세계약후 직원 사택으로 사용키로 하여,
손없는 이사날로 좋다는 날보다 십여일 먼저 짐을 꾸려 경황없이 20여년간의 죽정동 보령시민의 생활을 마감하고,
농부의 삶이 묻어나는 남포면 면민이 되었으며,
약 5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설계 변경 3회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무사히 완공 단계를 향해 간것도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게되며,
아담한 조감도와 달리 웅장한 멋을 풍기는 유럽형 40평대 창고형 일자 주택이 꼭 멋없게 단순 무식한 내 일생과 닮은 집이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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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는 문제속으로 뛰어들고 패자는 문제의 주변을 맴돈다
승자는 눈쌓인 벌판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쌓인 눈이 녹기만을 기다린다
승자의 주머니속에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속에는 욕심이 있다
승자는 등수나 포상과는 상관없이달리나 패자는 포상만 바라보고 달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감에 젖어 있으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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