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건강 등)

환관, 내시와 다른 까닭

kbd112 2020. 4. 12. 10:56


환관, 내시와 다른 까닭

 

환관은 거세된 남자로 궁에서 일하는 직책이다.

그들은 신체 특성상 여성들의 숙소에서 경호원이나 하인등으로 일했다.

내시는 조선시대의 관리 가운데 하나로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궐문의 수위,청소 등의 임무를 맡던 내시부의 관원을 가리키는데

거세된 남자만이 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시가 조선시대에 국한된 관원은 아니었다.


내시란 말 뜻그대로 내부에서 활동하는 시종,

즉 왕의 시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아주 오래전부터 세계 각국에서 활동해 왔다.

그러니까 환관 가운데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던 직책을 내시라고 부른 셈이다.

이렇게 환관이 왕의 측근에서 일하게 된 까닭에 역사적으로 보면

환관으로서 왕에 버금가는 아니 오히려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한 경우도 심심찮게 눈에 띤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시황을 보좌하던 환관 조고다.


는 제위를 맏아들 부소에게 넘기라는 진시황의 유언을 무시하고

둘째아들 호해에게 넘긴 후 부소를 죽이고 권력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국력이 일개 환관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을 맞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은

결국 통일된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환관이 되는 길은 선천적인 불구인 경우, 고용을 조건으로 거세되는 경우, 

형벌을 받고 거세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관은 누가 뭐래도 불후의 역사서 "사기"史記 의 저자 사마천일 것이다.

멀쩡한 사관이던 사마천은 유명한 이릉(李陵)의 

화(禍)( 흉노족에게 항복한 이릉 장수를 변호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형벌을 받은 것)를 당하여 

죽음을 택하느냐, 거세를 택하느냐,

아니면 벌금을 내고 자유인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거세형을 택한다.


선비로서 벌금을 내고 자유인이 되는 것이 마땅하나 그만한 돈이 없었고,

굴욕을 당하지 않고 죽기에는 자신에게 넘겨진 부친의 유지, 즉 훌륭한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지를 포기할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거세형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황제의 사면을 받은 사마천은 다시 궁으로 돌아와 중서령으로 일했고 

마침내 "사기"를 완성 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양에도 환관이 있었을까?

당연하다. 페르시아와 로마 시대에 환관이 궁정에서 일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특히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는 환관은 아니지만 카스트라토 라고 불리는 

여성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가수를 만들기 위해 사내 아이를

사춘기를 맞기 전에 거세하는 관습이 있었다 .


이는 여성들이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의 산물인데 

후에는 오페라에서도 이들이 맹활약했다.

그 외에도 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성직자도 있었고

3세기 무렵엔 거세한 자로만 이루어진 종파가 존재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초기에 궁형(宮刑,거세형)을 받은 자들을 주로 환관으로 채용했는데 

수나라 때에 궁형이 페지되면서 민간 지원자를 채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가난한 집안에서는 자식을 환관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621년 명나라에서는 환관 3000명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가자 마자

2만 명이 넘게 응모하는 사태가 벌어져 너무 치열한 경쟁에 분노한 응모자들은 시위를 벌였고 

이에 정부에서는 급히 채용 인원을 50% 늘려 4500명을 선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채용되지 못한 자들이 수도 인근에서 노숙하며 정부를 압박했다고 한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