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건강 등)

밀양(密陽)의 옛 모습

kbd112 2019. 10. 4. 05:49




밀양(密陽)의 옛 모습




풍수와 밀양다움 - 의열단 정신 낳은 밀양… 이념에 가둘 수 없어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가 꼽힌다. 영남루에 오르면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큰물과 저 멀리 종남산을 비롯한 뭇 산들이 지닌 위엄을 볼 수 있다. 영남루 경관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삼문동이다. 삼문동은 아름다운 섬이다. 지금은 비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영남루와 밀양을 돋보이게 한다. 삼문동은 밀양 속의 또 다른 '밀양'이다.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고문이던 백민 황상규의 묘소. 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가 참배객들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김두규 제공


영남루·밀양강·삼문동이 자아내는 산수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밀양 주변의 산·물·들판의 합작품이다. 산들은 높고 많고 웅장하며(山高多雄), 물은 깊고 완만하고 길게 흐르며(水深緩長), 그 사이 들판은 넓고 비옥하여 풍요롭다(野廣沃豊). 또한 밀양 지명이 암시하듯 빽빽한[密] 햇빛[陽]으로 곡물이 여물기에 좋은 기후이다. 아주 옛적부터 곡창지대였다. 밀양에 수많은 양반 고택이 산재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밀양은 삼문동이 밀양 속의 또 다른 '밀양'이듯, 영남 속의 또 다른 '영남', 한국 속의 또 다른 '한국'을 만들었다. "군자는 어울리되 동화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는 공자 말은 이 땅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밀양 청운리 안씨고택(안경환 전 서울대 교수 고향)에는 '앙지문(仰止門)'이란 현판이 하나 있다. 

안씨 가문의 철학이자 밀양의 정신을 대변하는 문구이다. '시경(詩經)'의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에서 유래한다. "높은 산은 우러러볼 만하고, 큰길은 갈 만하다"라는 뜻이다. 높은 산, 큰길은 단순히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함을 뜻한다.

밀양이 배출하는 인물들이 그러하다. 특정 이념이나 사상의 틀에 가둘 수가 없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전형이다. 훗날 사림파의 종장으로 추앙되는 김종직은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에 정면 반발하면서 성리학 유일의 계급 독재를 주장한 '아그똥한(야무지지만 맹랑한)' 인물이다. 

속세를 떠난 승려이면서도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승병을 일으키고, 이후 대일 외교에 성공한 사명대사는 승려이지만 유학자의 면모를 갖춘[儒僧] 독특한 존재였다.

대구사범 동기로서 군인 박정희의 5·16 쿠데타 멘토였던 황용주 역시 학도병 출신 언론인이었지만 '자유·평등·박애'를 최고 가치로 여긴 인문학자였다.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으나, 살아남아 우리 시대 인문학자가 되었다. 법학자 안경환 교수 역시 우리 시대 문제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고자 하는 학자다. 

신영복과 안경환은 선친 때부터 친구 사이였다. 한마디로 밀양의 땅과 그 땅의 정기를 받고 자란 인물들은 화이부동이면서 인류가 갖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개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아나키즘에 가까웠다.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 대통령이 김원봉을 언급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수와 진보 정치인들이 정쟁의 도구로 날을 세운다. 의열단의 고문·단장·단원·후원자에 이르기까지 주류가 밀양 출신들이다. 

독립운동 수훈자만 70여 명에 이른다. 북으로 간 사람과 공산주의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의열단 정신은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밀양의 풍토이자 문화였다. 

황용주도 해방 이후 김원봉의 비서를 지냈지만 북으로 가지 않았다.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여사(건국훈장 추서)의 무덤도 밀양에 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 아나키스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그가 의열단을 위해 쓴 글이 바로 '조선혁명선언'이다. 답사 중에 만난 밀양 사람들은 의열단에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자유한국당 소속 박일호 시장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자랑스러운 밀양의 정신으로 자부할 정도이다. 밀양이 밀양다운 이유이다. 

[출처] : 김두규 :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아무튼, 주말- 김두규의 國運風水> -풍수와 밀양다움 / 조선일보, 2019.6. 15.




영남루 (1888~1889년)



밀양 남문 그림


'밀주징신록'에는 남문이 3층 3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문 아래쪽의 6개 축을 포함한 것으로, 이 6축을 빼면 정면 3간 규모의 2층 문루로 여겨진다.

당시 밀양 남문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쌓아 6축을 높게 형성하고,그 위에 팔작 지붕으로 2층 문루를 건축한 형태이다. 6축의 중앙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 ; 무지개라는 뜻)를 만들어 출입로를 형성하고, 그 안쪽에 성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샤를바라(프랑스인)와 야이에롱(미국인)이 1888~1889년에 걸쳐 조선을 기행한 후 귀국하여 출판한 '조선 기행' 책에 수록된 영남루 앞.조선시대 촌노의 모습을 데생으로 그린 풍속화이다.

 

밀양성 남문 쪽 데생 



1910년대 영남루에서 본 시가지 사진


밀양부 지도

 


참고자료 : 밀양성을 중심으로 한 성곽 예상도(빨간 선), 출처 : 팬저의 국방 여행



밀양교가 놓이기 이전에는 여러 척의 배를 연이어 정박시키고 그 위로 길을 만든 소위 뱃다리가 있었다. 뱃다리는 192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전에 삼문동으로 통행하는 방법은 이렇게 배를 이용하는 방법 뿐이었다.  


 


1911년 영남루. 왼쪽 끝에 남문이 보인다.



뱃다리를 지나는 자동차. 당시로서는 매우 진기한 풍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5년 밀양초등학교 제 5회 졸업 기념



1926년 밀양유치원 제1회 졸업 기념



1929년 밀양소작인회 총회 기념 촬영. 소작인과 지주, 일본인들이 함께 했다.

배를 엮어 만든 다리(뱃다리). 내일동과 삼문동 쪽 다리목을 뱃다리껄이라고 불렀다.(1930년)



삼랑진역



 

1920년대 삼랑진 작원관




작원관을 지나는 증기 기차



참고 그림 - 옛 작원관과 현 작원관



1932년 밀양경찰서. 내일동 관아 부근 



영남루 다리 건너 지금의 삼문동(1933년)

​​

1947년 퇴로리 야학교, 일제 잔재의 군복, 가마니틀 등이 이채롭다. 



1947년 밀성공립보통학교 제5회 졸업기념 사진



1951년 무안중학교 제3회 졸업 기념 


이하 컬러 사진은 1951년 6.25사변으로 인해 밀양에 주둔했던 미8군 565부대 톰 그라스코 씨가 촬영한 사진임. 아북산(밀양여고 뒷산)에서 바라본 교동 쪽, 향교가 동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범북 고개가 고개답게 보인다. 

아북산에서 본 내일동과 삼문동 방면.

용두목에서 삼문동 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미군들.유성모직 공장과 그 주변의 솔밭이 보인다.


용평동과 일자봉. 산은 완전 민둥산이다.


아북산에서 본 용평동과 용두목.



동문고개 쪽에서 본 용평리


1951년 약전 골목. 
태화반점, 남선양행 등 상점 간판이 보이고, 멀리 아북산 정상의 망루가 보인다.


밀양역. 


상설시장 포목상


영남루 1951년

----------- 이상 톰 그라스코(Tom Grasco) 사진 ------------------- 


1951년 삼랑진역. '군인 음료수' 통이 이채롭다.



1950년대 밀양초등학교



삼랑진역에서 과일 파는 아낙네들(1954년)



1957년 무봉사


 

1959년 사라호 태풍 피해



1959년 사라호 태풍 피해 - 영남루 다리목



1959년 사라호 태풍 피해 - 내이동 우체국 주변


1963년 영남루 주변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날 친구와 찍은 사진, 1960.4.3.​



1965년 밀양 시내


 

상남면 오산제방 수해복구 공사 준공식(1965년), 멀리 보이는 다리는 삼랑진 철교


1967년 밀양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옆에 있는 사람은 당시 국회의원 후보 공정식 씨



1969년 동가리 신작로 


1969년 밀양교 


삼랑진 수해 모습

소풍

무봉산 자락에서 용두목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들



​아북산(현 밀양여고 뒷산). 대규모로 돌을 캐내어 산봉우리가 망가졌다.  


무봉산과 내일동, 삼문동과 가곡동, 상남들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가곡동. 밀양도자기 공장(왼쪽 아래)와 밀주 초등학교, 예림교 건너 예림, 상남들이 보인다.



마암산 쪽에서 본 밀양 시내(1970년대)

 

마암산에서 본 삼문동. 오른쪽 중간은 밀양중학교인 듯.


 

유성모직 공장. 한때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방직 공장이었다. 지금은 유성 청구, 대우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공장 옆으로 삼문동 공설운동장이 보인다.왼쪽 위는 밀양중학교.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 홍보와 반공 표어.   



내이동 우체국 앞 간선도로 



가곡동 


내일동, 삼문동 



용두목 



동가리 신작로 

 

향교 쪽에서 본 교동, 밀성초등학교, 밀성중고등학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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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까지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3륜차가 행인들과 함께 영남루 다리를 건너고 있다.


영남루 앞 남천강에서 멱감는 아이들. 지금은 보가 생겨서 물이 고여 있지만, 1980년대 후반까지는 막힘없이 물이 흘렀다. 


 

 

1972년 삼랑진 율곡리 무곡마을 


 

1973년 밀양여중 소풍(용두목 용평 쪽) ,뺑뺑이(무시험 추첨)로 학교 배정을 받기 시작하던 때.  



1975년 밀양군청(오른쪽 길끝, 지금의 관아 자리) 왼쪽의 탑은 옛 밀양성당.


1975년 북성껄(밀양성의 북문이 있던 자리).교복 입은 학생들은 밀성중고등학교 학생. 



1975년 밀양 아랑제 가장행렬. 주로 밀성고, 세종고 학생들이 참여했는데 이 때부터는 밀양실고 학생들이 추가 참가해서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1976년 밀양 장날 



1976년 제일극장 


 

1977년 밀양 아랑제 



1978년 학도호국단 사열 



1978년 밀양역 



표충사 계곡. 환경보호운동 중인 듯



새마을 대청소(내일동)



1986년 국회의원 선거벽보 




부산대학교 밀양캠퍼스 도서관에서는 지난 2015년 9월 14일 부터 사진으로 돌아보는 밀양근대 100년 을 기획하면서 "도서관에서  옛 밀양을 거닐다" 라는 주제로 기획전시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