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자존심-
굶어죽은 판사와 고교선생님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윤9월 7일 병인 1번째기사 1452년 明 경태(景泰) 3년 경연관이 석강을 진강하다 경연관(經筵官)이 석강(夕講)을 진강(進講)하는데, 사무사(思無邪)라는 말에 이르러 노산군(魯山君)이 묻기를, "사무사(思無邪)란 무슨 뜻인가?"
하니, 박팽년(朴彭年)이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바에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바름을 일컫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바르면 즉 모든 사물(事物)에서 모두 바름을 얻을 것입니다."
하고, 박중손(朴仲孫)이 말하기를,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입니다. 마음이 바른 뒤에야 일이 바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니, 바르게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대저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면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그 명령하는 바를 어기지 아니하는 일이 드물 것입니다." 하였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극도의 식량난에 시달렸다. 한반도와 만주‧대만에서 수탈하던 식량 공급이 끊어진 데다 해외에 이주했던 자국민이 대거 귀국해 인구마저 늘어난 탓이었다.
맥아더 점령군 사령부는 고육책으로 ‘식량관리법’을 만들어 식량 배급제를 실시했다. 성인의 하루 배급량을 300그램으로 제한했는데, 300그램은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 배급량과 같은 극히 적은 양이다.
암시장에서 쌀을 사고팔다 걸린 사람만 매년 120만 명을 넘었다. 엄혹한 식량통제법 아래 도쿄고교의 가메오 에이시로(龜尾英四郞) 교사가 “학생들에게 바르게 살라 하면서 나 스스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며 굶어 죽었다. 가메오는 1945년10월 마지막 사흘을 양파 2개로 버티다 숨졌다.
일본 판사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 1913∼1947)는 명문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정통 엘리트 법관이었다. 1946년 도쿄 지방법원 경제사범 전담판사로 부임한 그는 곧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주 업무가 식량관리법 위반 사범 재판관이었는데, 당시는 배급만으로 연명하기가 워낙 어려워 쌀 암거래가 일반화돼 있었다. 판사와 관료들마저 불법 유통되는 쌀에 의지하는 형편이었다.
암거래 쌀을 먹으면 자신도 법을 어기면서 똑같은 법을 어긴 다른 사람들만 처벌하는 결과가 된다. 야마구치는 부인에게 선언했다. “앞으로 나는 배급 쌀만 먹겠다. 쓰러질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양심을 속이며 사는 것보다는 낫다”
그는 그나마 배급 쌀마저 대부분 세 살, 여섯 살 두 자녀 몫으로 돌리고 부인과 함께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가족이나 친척이 사정을 알고 쌀을 보내거나 식사 자리에 초대하려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1947년 8월 27일 야마구치는 도쿄지방법원을 나오다 청사 계단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고향으로 옮겨져 요양에 들어갔으나 10월 11일 결국 사망했다.
그들은 공자가 말하는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이 바르고 사악함이 없이 살다가 간 성인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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